35 전총을 전후하는 혁공동 정치국·전국위원에 의한 여성 차별 습격에의 탄핵 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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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통해 이번 사건과 성명서를 접한 한국사람이 9월 21일자 야지마 위원장 명의의 성명서를 번역해 주셨기에 소개합니다. 자원봉사자에 의한 번역임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덧붙여 말미에는 9월 28일자 전학련 명의의 성명 및 9월 11일자 혁공동 정치국 성명을 함께 소개합니다.


インターネットで今回の事件及び声明を知った韓国の方が9月21日付け矢嶋委員長名義の声明を翻訳してくださいましたので紹介します。有志による翻訳であることご理解ください。
なお末尾には9月28日付け全学連名義の声明および9月11日付け革共同政治局の声明を掲載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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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전총을 전후하는 혁공동 정치국·전국위원에 의한 여성 차별 습격에의 탄핵 성명

야지마 히로
전학련 위원장 마르크스주의학생 동맹·중핵파/혁공동 중앙학생조직위원
혁공동 전국위원/혁공동 중앙여성해방조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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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이번 건에 대한 성명 발표가, 대폭 늦어진 것을, 지각 있는 혁공동의 동지나 공투 단체 각위, 지원해 주시는 여러분에게 사과 말씀드립니다. 그동안 학생 동료들에 대한 당으로부터의 폭력적 습격이 속발하고 생활수단·활동수단의 대부분이 혁공동 본부·전진사에 빼앗긴 가운데 2024년 12월 경대집회를 이유로 한 2학생에 대한 체포탄압에 대한 구호활동 및 전학련 정기대회를 진행했습니다. 특히 우리를 지지하고 함께 싸우기로 결심해 주신 분들과의 정중한 내부적인 토론에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오늘에야, 국가 권력으로부터의 방위상의 문제도 검토한 뒤, 이번 성명을 발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혁공동 제35회 전국위원회 총회(이하 「35전총」)에 관련해 「이시다에 의한 사당화와 당 파괴」등과 혁공동 정치국이 이야기하고 있는 사태의 일련의 흐름을 개략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올해 7월, 저는 남편인 이시다 마유미의 정치와 생활의 양면에 있어서의 여성 차별적 행동을 비판하는 문서를 본인 및 신뢰할 수 있는 동지 수 명에게 제출했습니다. 이후 약 1개월 반에 걸쳐 토론을 조직적인 확인하에 여러 번 갖고, 9월 첫주 단계에서 이시다의 전환은 제가 승인할 수 있는 곳까지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최종 과정에서 정치국이 강권적으로 개입하여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① 정치국회의(8월 31일)에서의 나를 완전히 배제한 이시다 처분의 결정
② 정치국에 의한 이시다의 자기 비판 토론의 파괴
③ 나와 이시다가 쓰고 있던 문서의 극히 일부만을 무단으로 대량 배포·확산하는 것에 의한 인상 조작=“이시다의 악마화” 공작
④ 이들에 항의한 나에 대한, 「[이시다]*문제를 둘러싼 토의」라고 칭하고 수 시간에 걸친 협박·여성 차별 폭언을 퍼부어 굴복을 강요하는 「회의」 개최(9월 4일)
⑤ 나의 절대 반대 의사를 완전히 무시하는 형태로 35 전총에서 「이시다의 여성 차별 문제」를 밝혀 처분 결정한다는 취지의 일방적 통지
⑥ 35 전총 당일(9월 6일), 나 및 연대한 학생 동료들에 대한 여성 차별적·폭력적 습격과 전진사로부터의 당일의 실력 행사를 통한 전원 축출
⑦ 9.11 혁공동 정치국 성명에 의한 우리 학생 동지들의 봉기에 대한 왜곡과 스스로의 여성 차별 행위·조직규율 파괴의 은폐
⑧ 나를 포함한 봉기에 찬동한 학생동지들에 대한 추가적 폭력적 습격·이간 공작, 당내외 불문하고 현재도 계속되는 정보 확산에 의한 나에게의 2차 가해의 확대
...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상과 같은 필설에 다하기 어려운 여성 차별 행위, 조직 규율 위반·조직 파괴, 폭력적 습격 등의 계급 범죄가 35전총을 전후해 혁공동 정치국 및 전국 위원들에 의해 지극히 흉포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계급범죄로 손을 물들인 현 정치국원들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고, 모든 정치국원의 자기 비판과 사죄를 다시 요구합니다.

서두에 명확히 하고 싶은 것은, 이번 봉기의 「주모자」가 야지마 히로라는 것입니다. 정치국은 「이시다 일파」등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만, 학생 동지들이 정치국을 규탄하는 연명 문서에 이름을 올려 봉기한 것은, 정치국에 의한 저에 대한 여성 차별 습격에 대해, 모두 항의해 주었으면 하는 제 요청에 응해 준 것입니다.

9월 11일자로 인터넷상에 공개된 정치국 성명(이하, 9.11 정치국 성명)은(이 필자는 분명히 서기장·아키즈키입니다), <'동요'한 고발자=나를, 이시다가, 전면에 서게 했다>라고 그려내고 있습니다. 공안 경찰이나 우익이, 「여성 전학연 위원장은 포장/괴뢰/간판/마스코트」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멸시에 물든 여성관을 자기 폭로하는 것입니다. 그런 썩어빠진 사상을 가진 인간이 정치국의 중추인 것이야말로 이번 여성 차별 사건을 야기한 핵심적 원인 중 하나임을 서두에 단죄합니다.

이하, 사태의 개요를 사실에 근거해 분명히 밝힙니다. 조직 내부 상황의 폭로를 포함하는 것은 알고 있지만, 사실이 은폐된 채로는 정의를 밝힐 수 없다는 결단 하에서의 성명임을 이해해 주십시오. 아울러 정치국에 의한 엉터리 정보 확산으로 인해, 제가 실명으로 이러한 성명 발표-사생활의 공표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도 강력히 비난합니다.

  • 주) 기실 조직명인 부분은 [(본명)]의 형태로 기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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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 이시다는, 2021년부터 교제 관계에 있었고, 생활상·행정상의 이유로 2024년부터는 입적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내외 불문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숨기지 않았습니다만, 우익 등에 공격 재료를 주고 싶지 않기 때문에 SNS등에서의 공표는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짧게 말을 하면, 이 4년 반 동안은 즐거운 일도 괴로운 일도 많았습니다. 나와 이시다 쌍방이 「당의 얼굴」 혹은 「지도부」로서 중책과 임무를 담당하는 바쁜 가운데, 휴일을 즐기러 외출하기는커녕 단란한 시간도 낼 수 없는 「무가족 상태」에 고뇌하면서도, 관계의 유지에 최대한의 노력을 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객관적 상태에 규정된 제가 이시다에 대한 분노나 불신을 크게 가지고 충돌하는 일도 많이 있었습니다만, 기본적으로 그는 가장 저를 지지해 준 신뢰하는 동지였습니다.

올해 7월 중순, 저는 남편에의 비판을 통해, 개인에게 나타난 조직·운동내에 있어서의 여성 차별적인 자세의 변혁을 강요하는 문제 제기를 실시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가정 영역을 「바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라고 하는 논리로 무시해 온 것에의 분노, 17년전의 여성과의 관계(여성측의 이혼이 성립하지 않은 단계에서의 교제)를 제삼자로부터 듣고 알게 된 것에의 분노, 이러한 방식을 낳고 재생산해 온 조직에 대한 분노입니다. 게다가 '그루밍'과 '성적 동의'의 개념과 실태를 배우는 가운데 솟아오른 문제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사회에서 사는 한 연애/부부 관계에 <성폭력>성 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덧붙여 SNS상 뿐만이 아니라 당내에서도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에 거두절미해 두지 않으면 안됩니다만, 거절의 의사 표시를 무시한 문자 그대로의 폭력적·강제적 「성폭력」이나, 저와의 관계가 시작된 이후의 시기에 불륜을 했다는 사실은 없고, 이시다에 대한 규탄 내용에서도 그러한 ‘피해’ 주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로부터의 문제 제기 이래 1개월 반에 걸쳐, 정치국원 N, 학생 지도부 2명, 도쿄도 위원회의 여성 동지 M이 함께 토의를 계속해, 그 동안, 저의 요청에 관계자가 응하는 형태로 이시다를 자기 비판에 전념하는 활동에 제한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저 개인으로서는 그의 전환·변혁을 「인정」할 수 있는 곳까지 도달해 왔습니다. 거기서 9월 중순으로 예정하고 있던 전학련대회 이후에, 논의해 온 내용을 보다 넓은 범위의 동지들에게 공유해 토의에 붙일 것을 8월 중순에는 제가 제안했고, 누구로부터도 다른 의견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8월 21일 학생지도부 회의에서 문제의 개요에 대해 처음으로 널리 공유했을 때의 이시다의 언동이 '경솔한' 것으로 느껴져, 센시티브한 문제인 만큼 학생 동지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불안해져 동요 상태에 빠졌습니다. 또, 상세한 설명은 생략하지만, 그날 밤 다른 학생 동지가 쓴 문서를 읽었을 때, 그 내용이 나의 불안과 연계되어 동요 상태가 가속해, 다음 날 심야에 자살을 암시하는 메시지를 전술한 학생 지도부 2명에게 보냈습니다. 그들로부터 연락을 받은 여성 동지 M과 여성 노동자 동지 R이 즉시 달려와 줬는데, 그로 인해 "달려와주지 않았던" 남성 동지에 대한 불신이 상대적으로 강화되어 버렸습니다. 이시다도 달려가려고 했지만, 여성 노동자 동지 R이 「오지 말라」라고 해서 저지된 것은 나중에 들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여성동지M을 통해 정치국원HS가 이시다나 정치국원N에 대해 말한 이야기를 듣고, 이시다에 대한 불신감이 증폭된 상태에서 여성동지M과 여성노동자동지R의 강한 의향에 따라 정치국원HS, TY등을 개입시키는 형태로 8월 28일에 회의가 예정되었습니다. 이때 제출한 이시다와의 가족관계를 조목조목 극단적으로 나쁘게 그린 짧은 문서가 이시다의 「죄상」의 근거로 이용되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불과 3일 후인 8월 31일 정치국은 “8/28 [야지마] 동지로부터의 [이시다] 동지의 성폭력 고발은 [이시다] 동지 자신도 인정하고 있다. [야지마] 동지에 대한 행위는 중대한 계급 범죄이다” “[야지마] 동지에 대한 4년 이상에 걸친 성폭력, 여성 차별”이라고 하는 “8.31 정치국 결정”을 실시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 앞둔 35전총에서 그 결정을 전당에 알리고 결의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일련의 결정에 대해서, 해당자인 저에게는 아무런 보고·연락·상담도 없었습니다.

그날 밤, 정치국의 이시다에 대한 「사정 청취」가 행해져, 거기에는 저도 동석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정치국에 대한 불신감은 결정적으로 커졌습니다. 정치국원 HS가 이시다에 대해 「8/28문서에 써 있는 것은 사실인가?」라고 물어, 이시다가 「개략적인 기술이므로 상세를 확인할 필요는 있습니다만, 기본적으로는 인정하는 입장입니다」라고 주체적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을 표명한 것을 확인했을 정도이지, 그 이상의 「사실 확인」은 거의 없었습니다. 원래 제가 이시다에게 요구해 온 것은, 이시다 자신이 저에 대한 여성 차별적 행동을 인정하는 것이 출발점이며, 다양한 배경 사정 등은 나중에 논의의 대상으로 해야 한다고 토의해 왔기 때문에, 이시다가 그렇게 회답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이시다가 그 자리에 지참한 자기 비판문의 시작 부분에 해당하는 매우 간단한 메모도 같은 입장을 표명한 내용입니다만, 이 메모도 제가 8월 28일 회의에서 제출한 문서와 세트로 「자백한 증거」로서 뿌려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정치국원 TY가 이시다에 대해 내용없는 비판을 한 끝에, 이시다가 메모 속에서 쓰고 있던, 여성 해방 투쟁에 관심이 있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명예 남성」이라는 용어에 의문을 제기하며, 「이것은 무슨 의미냐」라고 질문해 오는 등, 그 수준의 낮음을 노출시켰습니다. 게다가, 그 용어는 이미 1개월 전에 제출된 이시다의 첫 번째 자기 비판문 속에도 나오고 있었던 것으로, 그것조차 읽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컨대, 이 문제에 대한 기록의 내용적 논의도 검토도 하고 있지 않은 정치국의 실태가, 회의 장소에서 속속 노출되어 갔던 것이었습니다.

정치국원과 직접 이야기할 기회를 가지는 가운데, 그 권위주의적·외재적(남의 일이라는)·비주체적인 「책임」의 취급 방법에 불신감을 안고 있던 나는, 9월 2일에 정치국에 대해 「이 건의 취급을 맡길 수 없다」라고 하는 문서에 이유를 더해 제출했습니다. 그것은 정치국 내에서 '성폭력'이나 '계급범죄' 내용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8.31 정치국 결정'에 이르는 논의의 과정이나 내용을 물어도 정치국원의 누구도 일절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통해 밝혀져, 「야지마가 <성폭력>이라고 표현했고, 이시다도 그것을 인정했다」라는 확인만으로 「8.31 정치국 결정」을 35전총의 기본 방침으로서 진행하려고 하는 방식에 대한 불신감의 표명과 항의였습니다. 그러자 9월 3일에는, 정치국 전체가 외재적 태도를 관철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주체적으로 관여하고, 9월 2일의 제 문서도 지지해 준 정치국원 N을, 여러 명의 정치국원들이 둘러싸고 이시다에 옹호적인 입장이라고 규탄하였고, 정치국은 저와 이시다의 접촉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 일은 제가 정치국원 N에게 말을 걸어서 그 날 알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정치국은, 9월 4일에 예정하고 있던 이시다 본인과의 자기 비판 토의 일정을 중지하는 것을, 전날이 되어 일방적으로 제게 통지했습니다. 이 자기 비판 토의는 8월 31일 회의 때에, 1개월 반에 걸친 이시다 자기 비판에 마지막으로 승인을 주어 매듭지을 수 있는 단계에 왔기에, 제가 열기 희망한 것이었습니다. 거기서의 논의에 근거해 35전총에서의 이시다의 취급도 상담·검토해 정하고 싶다고 하는 것도 명확하게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중지하고 대신 열린 것이 정치국의 방침에 반대하는 나를 이시다와 정치국원 N을 배제한 뒤 10명 가까이가 둘러싸고 몇 시간에 걸쳐 여성 차별적 언사를 퍼부으며 공갈하고 굴복을 요구하는 '회의'였습니다. 일찍이, 서기장 아키즈키가 중시코쿠 지방위원회에서 성폭력 고발자에게 「조직 파괴자」라고 하는 레테르를 달고 교살, 압살해 온 것이 34전총에서 결정적인 문제가 되어, 서기장이 자기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잉크도 마르지 않는 가운데 '피해를 호소하지 말라'는 형태에서 '이상적 피해자로 행동’하라는 식으로, 형태만 바꾸어 자기 비판했던 사태와 거의 같은 것이 재연된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해당자인 나와의 논의도 총괄의 일치도 없는 내용으로, 일방적으로 8.31 정치국 결정을 35 전총 결정으로 하여 전당에 주지되는 것, 게다가, 그것을 내가 스스로 당 회의의 주최 측으로서 학생 동지들에게 말해야 하는 것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알고 있는가“ 「8.31 정치국 결정은 몇 개월부터 수년의 고투 끝에, 이시다의 전환을 추진해 온 나의 노력을 박탈하는 것이고, 무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고, 오명을 씌우는 것이다. 이런 것을 내면, 나는 망가져 버린다」라고 되풀이해 호소했습니다.

그 직후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임시로 개최된 정치국 회의에도 저는 단신으로 출석해 “이런 것이 나오면 나는 당일 궐기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고 있는 것인가. 그 책임을 당신들은 져야 한다”라고 예고까지 했습니다만, 정치국은 “8.31 정치국 결정은 철회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태도를 고지했습니다. 정치국원 HS는 「그럼 고발은 거짓말이었는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말해도 좋다, 35 전총의 장소에서」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의 당 생활 속에서 내가 이시다를 규탄한 내용과 겹치는 그 이상의 여성차별적 행위를 정치국원의 많은 이들도 범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너희들도 가해자들인 것'이라고 지적했더니, 정치국원 FR은 '수십 년이나 이 활동을 하고 있으니까 당연하다.’라고 묵살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키즈키가 「야지마는 이시다에게 마인드 컨트롤 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 들었습니다. 이런 수준의 정치국이 이시다에게 '자기 비판’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해졌습니다.

이를 전후하는 과정에서 정치국원 HS, 신뢰하던 여성동지 M, R 등이 선두에 서서, 다양한 당 기관 회의(일부 임시로 개최된 것도 있었다고 한다)나 개인에 대해서, 제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을 포함해, 알고 있는 것만으로 적어도 수십명에게 내가 쓴 문서가 무단으로 뿌려져 이용되고 있던 사실도 발각되었습니다. 가정내의 성적인 관계도 포함하는, 신뢰할 수 있는 인물에 한해서 공유·상담하기 위해 제출한 내 문서의 극히 일부, 그 중에서도 가장 나쁜 표현으로 이시다를 그린 부분이 배포되었습니다. 이 외에도 어느 누구에게 어떤 문서가 확산되고 있는지를 질의해도 정치국은 전혀 밝히지 않았습니다. 사태는 현재 진행형으로 이미 관련 문서는 당원이 아닌 인물의 손에도 건네져 인터넷에 확산되어 제 본인 특정이 이루어지는 상황까지 확인되고 있습니다.

센시티브한 내용의 무단 폭로, 「야지마씨의 본심은 이렇다」라고 하는 단정에 근거한 대응 등, 이것 자체가 전형적인 「2차 가해」그 자체이며, 여성 차별에의 무지・무이해・저수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정치국의 남성들과는 조금 달리, 여성인 M과 R은 「여성 차별과 싸우고 있다」라고 하는 의식으로 제 문서를 뿌렸다고 생각합니다만, 바로 「지옥에의 길은 선의로 포장되고 있다」라는 말대로입니다. 두 사람은 제 분노에 공감이나 지지는 해 주었지만, 제가 문제 제기한 내용에 대해 사상적·노선적으로 깊게 정리하는 논의가 그녀들로부터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들은 끊임없이, 간사이에서의 OZ에 의한 여성 차별 사건의 조잡한 분석을 가지고, 최종적으로는 제게 “정치국 결정에 따르라’고 요구했습니다. 9월 4일과 35전총 당일, 여성 동지 R은 저를 “당신은 우리를 배신했다!”며 강력하게 비판했습니다만, 하지만, 제가 믿고 제출한 문서들을 허락 없이 배포하는 배신(개인적 배신일 뿐 만 아니라, 당적 신뢰를 철저히 파괴하는 배신)을 먼저 저지른 것은 정치국과 여성동지 M과 R입니다.

이러한 운동 속에서 여성들은 여성 차별을 고발할 수 없으며 동료를 신뢰하고 투쟁할 수도 없습니다.

(2)

9월 4일 밤의 임시 정치국 회의를 거쳐 5일 미명, 35전총에서의 「8.31 정치국 결정」의 전당 공개의 강행이 다음날로 다가온 가운데, 저는 이런 썩어빠진 정치국-당의 본연의 자세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고, 이시다의 자기 비판의 관철과 동시에 여성 차별에 맞선 투쟁의 전진, 가족 문제의 해결을 위해, 운동조직과 거기에 속한 개개인으로서의 자기 비판·자기 변혁을, 스스로의 책임하에 행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이를 위해 정치국의 잘못된 대응을 비판하는 개인 명의의 문서와 현 정치국을 철저히 규탄하는 연명 문서의 작성을 개시했습니다.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태를 처음 듣는 동지도 다수를 차지하는 가운데, 사정을 설명해줄 수 있던 중앙 학생 조직 위원회의 약 20명 전원이, 불과 하루만에 연명에 응해 준 것으로 당일의 봉기가 실현되었습니다.

35 전총 당일은, 지금까지의 과정의 “정점”으로서, 저 및 학생 동지들에 대해 숱한 매도·조소가 퍼부어졌습니다. 정치국원 FR은 정치국에 의한 정보 확산을 탄핵하는 학생들을 「너희들은 페미니스트냐」라고 「매도(!)」했습니다. 아키즈키는 “(우리는) 청년·학생·여성을 조직한다! 페미니즘 써클에서의 논쟁을 하자는 것이 아니야!”라고, 지난 수년간 우리의 여성 해방의 싸움에 공감해 운동에 합류한 여성 동지들의 존재를 모욕했습니다. 「마인드 컨트롤」발언에 대해 학생들이 항의하자, 횡설수설하며 「어디가 차별 발언이야! 언어적 수사였을 뿐이다!」라고 천황 히로히토가 전쟁책임을 회피하던 수준의 답변을 해주었습니다.

제가 회의에서 발언을 인정받아 단상에 올라 이 성명에서 말한 것과 같은 내용을 말하자 회장에서는 「이시다 옹호 그만둬」등의 매도, 야유, 조소, 큰 한숨의 합창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발언의 종반에 정치국원 각각이 이 며칠간 벌인 여성 차별적 습격에 대한 규탄을 개시한 순간에, 전국위원들과 방청자들은 가장 격렬한 야유·고성을 날렸고, 여성 동지 R의 폭주를 계기로 참가자들이 일제히 저를 붙잡아, 마이크의 전원을 끄고, 저를 무대에서 폭력적으로 끌어냈습니다. 스스로도 당내에서 여성차별·성폭력을 당해 온 여성동지를 선두로 배제가 행해지자 정치국의 남자들이 히죽거리면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그로테스크한 광경야말로, 35전총의 현장에서 제가 본 것이었습니다. 일신의 위협을 무릅쓰고 저를 지키려고 한 학생 전국위원·방청 참가 동지 전원을, 정치국 옹호자들은 적 권력·기동대 이상의 적의로 폭력적으로 배제했습니다. 정치국이 자의적으로 잘라낸 정보만을 며칠 전에서 당일에 듣는 것만으로 단 1개월 전에 함께 8.6 히로시마 반핵집회에서 투쟁한 학생의 배를 걷어찰 수 있다고는, 도대체 「마인드 컨트롤」되고 있는 것은 어느 쪽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 기세 그대로 그들은 당일에 우리를 입은 옷 그대로 전진사에서 쫓아내는 것까지 실행했습니다. 저를 포함한 젊은 세대의 동료들은 「카쿠마루」를 실제로 체험한 감각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3)

여기서 나타나는 것은 제국주의의 최말기적인 위기 아래 전쟁정세·내란정세가 성숙하고 혁명과 반혁명의 분기가 한순간에 준엄해지는 시대에 돌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9.6 봉기는 혁공동 정치국이 제국주의가 낳은 차별이데올로기에 굴복하고 차별과 대결하는 투쟁의 준엄함을 외면해 온 현실을 폭로했습니다. 그들은 ‘조직규율’을 들먹이며 지난 몇 년간의 반전투쟁 및 그와 일체로 추진되어 온 여성 해방투쟁에 대해 정면에서 적대하는 최악의 차별자 집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동안 많은 청년·학생·여성이 계속해서 반전운동에 참가하는 가운데, 우리의 조직·운동이 이 사회에 만연하는 차별과 배외주의, 특히 여성 차별의 현실에 맞서 싸울 수 있는지의 여부가 특히 젊은 동지들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문제로 되어 왔습니다. 저 자신을 되돌아 보면 마르크스주의 학생 동맹을 만난 2020년 당시는 전학련의 중심적 활동가 중 여학생이 ‘제로'가 된 상황이었으며, 수도권에서는 제가 첫 번째 여성 멤버로 결집했습니다. 거기서 「지금 당에 부족한 부분은 내가 만들자」라고 결의해, 의식적인 이론적, 실천적 노력을 통해 한 사람, 또 한 사람의 여학생, 섹슈얼 마이너리티 당사자가 운동에 가세해, 반전 운동의 발전과 일체로 여성 해방 투쟁의 심화를 쟁취해 왔던 것입니다. 특히 작년 4월에는 전학련의 마츠모토 아야노 씨가 시위 참가자로부터 성폭력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이에 대한 결기와 총괄을 통해 '운동 내 여성차별과의 싸움'에서의 실천적 대처가 한층 더 도약했습니다. 이 4.28성폭력사건에 대해서는 고발자 자신의 문제 제기에 의해 학생 동지들 내부에서 3개월에 걸쳐 조직적인 토의를 한 뒤 반년에 걸쳐 당과 관계 제단체에 공유하고 사건으로부터 1년 후에야 인터넷상에 공개했습니다. 「도대체 중앙 SOB[학생 조직위원회]가 스스로 제기한 작년의 『4.28 총괄』…(중략)…을 통해서, 격렬하게 토의해, 서기장을 비롯한 정치국, 전국위원회 전체에서 철저하게 자기비판하고 총괄한 것은 무엇이었는가!」(9.11 정치국 성명)이라고 하는 것은, 아키즈키가 무엇을 생각하고 말했는지는 전혀 불분명합니다만, 어쨌든 피해자 여성을 방어·존중하면서 조직적 교훈·강령적 심화를 이루어 온 여성 해방 투쟁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자기 폭로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7월의 제 이시다에 대한 비판은, 전국 위원이나 정치국원인 남성을 포함해 당중에서 아직도 횡행·재생산되고 있는 여성 차별의 현실을 고발해, 당 전체의 변혁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제기는 남편 개인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조직 전체의 본연의 자세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치국과 그 추종자들은 정치국원인 이시다의 문제가 정치국 전체 나아가서는 당 전체의 문제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개인의 악마화와 처단으로 조직 전체-자기 자신의 변혁을 거부하며 보신에 나섰습니다. 「차별자인 이시다를 처단한 정치국」으로서 당 전체·계급 앞에 등장하고자 하는, 지극히 정치적인 의도가 35전총의 「기정 방침」으로 되었습니다.

이시다가 여성차별이라는 차원에서 '반혁명'으로 '제명'이라면, 도대체 몇 명의 정치국원·전국위원(특히 남성)이 반혁명으로 제명되어야 할까요. 상징적이지만, 저보다 당의 실태를 잘 알고 있는 여성 동지 M은, 지난달에도 저에게 “전국 위원의 9할은 여성 차별자인데, 가장 앞에서 지금의 당을 만들어 온 히로양이 전국 위원회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은 이상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번에 구체적으로 예를 드는 것은 삼가합니다만, 단순히 '고발'되지 않았을 뿐, 보다 심각한 '여성차별·성폭력'이 당내에도 무수히 발생해 왔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치국·전국 위원회의 성원들이, 이시다에게 향하고 있는 분노와 폭력성을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향한다면, 정치국도 전국 위원회도 자기 붕괴하는 수 밖에 없는 상태가 아닌가요. 제가 바꾸고 싶었던 것은 이런 당의 현실입니다.

7월에 이시다를 비판한 문서의 결론으로서 기술한 것 - “이 리포트는 전체를 통해, [이시다]에 대한 불신·불만·비판을 계속해서 쓰고 있지만, [이시다]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운동·조직이 도약해 가는 가운데 당적 지도의 방법 그 자체가 벽에 부딪히고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다” “발생하는 조직 문제에 대해 사상적으로 내놓고 총괄할 수 있는 데까지 오지 못하고, 문제가 폭발할 때까지 보지 못한 척 하고, 해결 할 수 없으면 개인에게 모순을 집적, 비난을 집중시켜 압살하는 그런 경험주의적일 수 밖에 없는 정치에 의해 매우 큰 모순을 남기면서 진행되고 있어 그 모순이 지금 다양한 형태로 터져 나오고 있다.” - 이것이 제 문제 제기의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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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정치국 성명의 “혁명적 여성 해방 투쟁이란, 성폭력의 계급 범죄성에 대해 『원리・원칙과 구체적인 사건의 평가에 대해 상세하게 말하는 것』에 열중하거나 … 정의 짓는 것은 전혀 아니다…”라고 하는 기술은, 여성 해방 투쟁에의 무지·무이해를 드러내는=적대이며, 그것은 학생 동지들이 열어 온 지평의 전부정이기도 합니다. 모든 사건을 분석적으로 말하고, 통틀어서 같은 '성폭력'으로 단죄하는, 이러한 개별적 구체성의 기각으로부터 여성 해방 투쟁의 패배는 태어나는 것입니다. 정치국과 그 추종자들은 말끝마다 "00과 같다"며 일련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과거에 당내에서 일어난 다양한 여성차별 사건과 거칠게 겹쳐 '이해' 하는 것으로 「이상의 가해자상」을 그려내고(=이시다의 악마화), 이것에 대응하는 「이상의 피해자상」에서 벗어난 언동을 취하는 저에게 「2차 가해」를 행하고 있습니다. 아마 "00과 같다"는 것을 금지어로 하면 여성 차별에 대해 말할 수 없어지게 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34 전총을 전후하는 과정에서 OZ의 문제를 '당초에는 여성차별 문제가 아니라 연애 문제로 파악해 버렸다'는 발언이 많은 동지의 입에서 반성의 변으로 나왔지만, 나는 이런 '차별인가, 연애인가'라는 단순화는 매우 위험하다고 우려해 왔습니다. 그것은 흔한 남녀의 '치정 싸움'이나 '연애 문제'가 계급 사회나 여성 차별의 현실과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기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 사회에서, 여성 차별과 무관한 「연애」관계가 있을 수 있을까. 그런 것은 관념의 세계에만 존재합니다. 사유재산제 하에서 여성차별제도·이데올로기는 수천년에 걸쳐 항상 방대한 물질력을 가지고 우리 안에 체화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과 단절되지 않은 점검과 차별과의 전생활·전인격을 건 싸움에 사활을 걸어야 합니다. 「여성 차별인가, 연애인가」라는 분리·단순화를 한 순간에, 차별과의 싸움은 일상적 실천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입니다. 고 나카노 히로시 도로치바노동조합 고문이 말하고 있듯이, 전쟁의 시대에는 차별·배외주의와의 싸움은 “나는 차별·배외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차별·배외주의와 싸우고 있다”라고 자기 확인할 뿐인 운동은, 방대한 노동자층이 차별, 배외주의에 포섭되었을 때에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계급사회의 현실 속에서 인간적 가족관계가 파괴되면서 영위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공산주의자로서 어떻게 파악하고 조직이나 운동 속에서 자리매김하고 돌파해 나갈 것인가. 이 사실이 차례로 새로운 여성 동지들이 마르크스주의 학생 동맹에 가맹해, 그녀들을 마주하는 가운데, 제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게 된 것도 또한, 7월의 「고발」=보편적 여성 차별의 현실의 언어화에 이르는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OZ와 같이 동반자와 아이가 있으면서 복수의 여성과 관계를 갖고, 여성의 의사를 분명히 짓밟는 성폭력까지 한 인격을 즉시 처단해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만, 과연 OZ와 이시다의 여성 차별은 같은 정도일까요. 저 또한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기 위해 OZ와 비유해서 말한 적이 있지만, 이것은 극단적으로 단순화 된 것입니다. 저에게 가족관계를 <성폭력>이라고 일시적으로 생각하게 할 정도의 불신을 갖게 할 때까지의 「무가족 상태」를 강제해 온 이시다와 조직 전체의 범죄성은 심각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계급사회에서 사는 한 도망갈 수 없는 가족관계의 <성폭력>성을 묻는 것으로서 문제제기를 행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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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정치국 성명은 혁공동 정치국과 그 옹호자들이 노동자계급의 차별에 대한 현실의 싸움과 분노와는 어울리지 않는 존재로 전락해 버렸다는 것을, 더할 나위 없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26전총에서 우리 당이 자기 비판을 받았음을 재확인해야 합니다.

직장에서의 자본과의 현실적 공방, 계급 투쟁 실천을 외면한 당은, 자본·권력과 싸울 수 없는 당이 되어, 정치 투쟁, 한층 더 이론 투쟁에 있어서도 후퇴와 왜곡을 만들어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현실을 점점 마르크스주의에서 일탈·배반한 관념적 공론·공어로 기만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①자본·권력과 싸워서만 태어나는 ‘공산주의자로서의 자각’, ②계급투쟁의 실천에 의해서야 길러지는 ‘대중과 연결되는 정치능력’, ③대중에 의해 검증되는 ‘올바른 이론’이라는 레닌이 준 <혁명당의 규율을 보장하는 3가지 조건>의 상실이었습니다.

『혁공동 제26회 전국위원회 총회 보고』

바로 9.11 정치국 성명은 “이론 투쟁에서의 후퇴와 왜곡”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난 관념적 공론·공어”의 반복입니다. 「프롤레타리아 폭력혁명·공산주의의 실현과 결부되지 않는 여성 해방은, 「래디컬 페미니즘」이라고 말하건,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이라고 말하건, 실은 모두 사이비이다」 「여성 해방이란 공산주의의 실현 이외에 없는 것이다」라고 하는 구절은 상징적입니다. 물론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유재산제의 폐지 없이 여성 해방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몇 개월 전에 자기 비판 속에서 '여성 해방 투쟁에 대한 무지·무이해=적대'라는 상태에 있었음을 확인한 인간인 아키즈키가 여성 해방의 구체적 실천이 ‘계급적, 핵심적 진실을 자연발생적으로 투쟁하고 있는 무수한 여성들에게 단호하게 단언해' 가는 것이라고 잘난 척 뻔뻔스럽게 주장하는 것은 우습고 오만한 일입니다.

자주 있는 일이지만, 혁명적으로 생각은 하지만 두뇌가 혼란하기 쉬운 사람은, 「명안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언제라도」공식을 끌어내 인용한다. 그것은 요컨대 고려해야 하는 구체적인 사실에서 눈을 돌릴 때 일어난다.

『레닌 청년여성론』

정치국원이나 전국 위원인 여러 동지들은, 「수준이 낮다」라고 하는 제 비판에 대해, 「노동자 멸시다」라든가 「노동자를 깔보지 말라」라고 격렬히 반응해 오고 있습니다만, 저는 인텔리임을 과시하며 지식 마운트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게 아니라, 여성 대중이 보면 「이런 수준의 사람들/조직은 신용할 수 없다」라고 여겨질 것이기에 당연한 것이며, 정치국원·전국 위원이라고 하는 혁명당의 중추를 담당하는 공산주의자이면서, 대중에게 일절 인정받지 못하는 「수준」인 것을 저는 문제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여성들이 투쟁 속에서 만들어 왔던 것을 우선은 일단 배우려고 하는, 혁공동이 지금까지 토대에 놓아 온 태도의 결여,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자로서 항상 사상 「수준」의 갱신을 하려고 하는 태도의 결여가 문제입니다. 이를 '노동자 멸시' 등으로 비난하는 것은 공산주의자 당의 일원이 취해야 할 태도로서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노동자는 이론투쟁을 할 수 없다/하지 않아도 된다'는 노동자 멸시의 사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구 간사이 지도부에 대한 비판과 겹치는 것입니다. 34전총에서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은 「이시다 반혁명」 이전에 이미 망각되어 버린 것입니까?

정치국은 스스로의 권위 유지와 보신을 위해 35전총에서 하루가 지나 YouTube 계정 '전진 채널'을 삭제하고 스탈린주의적 역사 수정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학생에게 배우자!」라고 호령하며 반전 투쟁이나 여성 해방 투쟁을 추진하려고 한 것도 청산해 나갈 것입니다. 향후 ‘전진'기관지 상에서 '이시다 일파'에 대한 비방 중상을 반복해, 이시다의 악마화를 통한 내부의 결속의 유지, 전세계를 향한 루머의 유포나 저에 대한 2차 가해를 거듭해 나갈 것이 예상됩니다만, 저는 그것도 각오한 채 이번 문서의 공개에 이르렀습니다. 9.11 정치국 성명은 제 존재와 수년간의 투쟁을 모욕하고 훼손하는 것이며, 저는 반드시 살아남아 계속해서 정치국이 가하는 공격을 모두 분쇄하며 혁명을 향해 나아갈 결의입니다. 저를 '동요하여 가해자에게 포섭된 피해자'로서 그려내려고 하면 할수록 여성들을 비롯한 노동자 민중의 신뢰를 잃어간다는 근거를, 제 주체적인 투쟁으로 계속 만들어 내겠습니다.

(6)

지금까지 말한 것으로, 우리 봉기의 「주모자」가 저이며, 여성 차별과의 투쟁이라는 점에서도, 당내 규율·당내 민주주의의 관점에서도 9.6봉기가 정당하다는 것은 명확해졌으며, 정치국이 그리는 「이시다의 자기 보신을 위한 봉기·사당화 책동」등의 주장이, 얼마나 엉터리이고 「동화처럼 단순」한 작문인가 하는 것은 분명해졌다고 생각합니다. 9.6 봉기의 조직은 그 직전의 정치국의 저에 대한 여성 차별 사건의 발생과 그 은폐를 위한 당내 조직적 책동에 대항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이 때, 물론 연명자는 제명 등의 중처분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결의를 공유했습니다. 한편, 「조직 지도 계열의 남용」이나 「사당화 책동」 등이라는 비방에서 조직원들을 방어하기 위해 중앙 학생 조직 위원이 아닌 마르학동의 동료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전진사에서 쫓겨나기 전 까지는 사정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상황에 대응할 수 있다고 판단한 활동경력이 긴 한 명을 제외하고 중앙 학생 조직위원이 아닌 멤버는 연명에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개의치 않고, 정치국과 그 추종자들은 「너희들은 전원 더 이상 혁공동이 아니야!」 외치면서, 사정을 전혀 모르고 전진사에 있던 마르학동의 학생들까지 폭력적으로 내동댕이친 것입니다. EL5 문제조차 발생으로부터 결별까지 1년여의 시간을 필요로 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번과 같은 비동지적·비민주주의적인 당 운영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끝까지 당의 동지들을 믿으려고 했고, 정치국이 스스로의 여성 차별을 자기 비판한다고 태도 표명만 해줬다면, “재단결”도 있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만, 당의 부패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습니다.

이시다의 「자기 비판」에 대해서, 제 개인에 대한 것은 승인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전술했습니다만, 34 전총에서 제기해 추진한 정치국원으로서의 당이나 계급에 대한 자기 비판으로서는 아직 불철저하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합니다. 일련의 사태를 마주하여, 당초의 예정으로부터 크게 벗어나, 제 규탄과 이시다의 자기 비판의 전체상의 총괄이 불충분한 상태인 채, 제 이시다에 대한 원 비판 문서를 처음으로 읽은(읽지 않을 수 없었던) 동지들은 그 자체로도 큰 충격을 받고, 이시다에 의한 여성 차별, 당 안에 횡행해 온 여성 차별, 그리고 그러한 현실을 용인해 온 스스로에게 분노를 불태우고 있습니다. 또 사태의 격렬한 전개와 상황의 변화가 만들어진 현재 그 책임도 포함한 자기비판이 함께 싸우는 동료들을 중심으로 하여 노동자계급 전체와의 관계의 차원으로 요구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제외하면 이시다가 종래대로 중앙 학생 조직 위원회 의장으로 활동하는 것 등을, 저를 포함한 누구 한 사람 용인하는 동료가 없다는 것이, 이 2주일 간 반복해서 강렬하게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시다에게 근본적인 자기 비판을 시키는 책임을 우리 자신이 맡고, 계급에 대한 자기 비판을 머지 않아 분명히 밝히게 할 것을 약속합니다.

※덧붙여 이번 성명 발표에 대해서도, 정치국과 그 추종자들로부터 「야지마를 과녁에 서게 하고 뒤에 숨는 이시다는 비겁자이다」라고 하는 목소리가 나올 것이 예상됩니다만, 그의 자기 비판이 일정한 단계에 이르고 나서 말하게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하는 것이 학생 전선 지도부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또 그가 전학련대회장에 있던 것에 대한 비판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만, 대회 전날에 히로시마 당원에 의한 히로시마대학 지부 소속 학생 습격 사건이 있어, 이시다를 단독 행동시키는 것은 생사의 위험이 있다고 판단해 토의한 후의 일입니다.

(7)

미·일에 의한 중국 침략 전쟁=세계 전쟁이 눈앞에서 시작되어 수많은 아시아 인민이 학살되려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더해 외국인이나 여성,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격렬하게 부추겨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정세 속에서 '중국 침략전쟁 저지'를 내걸고 반전투쟁을 조직해 온 유일한 당파였던 혁공동이 수뇌부터 차별에 굴복하고 차별과 싸울 수 없는 당=제국주의 전쟁 책동과 대결할 수 없는 당으로 변질하고 있는 것은 일본 계급 투쟁에 거대한 위기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혁공동의 지각있는 당원 여러분에 대해, 이러한 썩어빠진 정치국의 철저한 타도에 함께할 것을 강하게 호소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어려운 가운데라도 '연대하여 침략전쟁을 내란으로'를 관철하는 중국 침략전쟁 저지·일제 타도의 반전투쟁을 새롭게 만들어 청년·학생·여성의 힘을 해방시키는 결집축이 될 대중운동당을 창출하기로 결의하고 있습니다. 모든 노동자, 학생, 시민 여러분, 마르크스주의 학생 동맹 및 전학련의 기치 아래 10·7 팔레스타인 봉기 2주년 신주쿠 반전 시위에 결집합시다. 그리고 혁명당의 재건에 절대적인 지원 및 모금을 부탁합니다.

9.6 봉기에 참가한 학생 동지들, 그리고 직후 사태를 알게 된 학생·노동자 동지들은 대열을 굳게 짜고 결코 혁명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9.11 정치국 성명을 읽은 많은 노동자 당원·지지자들로부터도 의문과 분노의 목소리가 분출해 우리의 대열에 동참하고 싶다는 표명이 전해져, 9.6 봉기의 정의성은 날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정치국과 그 추종자들의 철저한 자기 비판과 전환이 없는 한, 혁공동은 전학련 및 마르크스주의 학생 동맹을 영구적으로 상실하게 될 것을 최후의 경고로서, 성명의 결론으로 삼습니다.

이상


9월 28일 발표된 전학련 성명

革共同関西地方委員会による全学連への女性差別襲撃を弾劾する

全学連は、起訴の報を聞いた直後、これを弾劾してAさんを激励する行動に京大生を先頭に決起した。この闘いの現場において、革共同関西地方委員会による学生への集団的襲…


언급된 혁공동 정치국 9. 11. 성명

石田による私党化と党破壊を粉砕 女性解放闘争と反戦闘争の爆発へ – ZNN.JP

第35回革共同全国委員会総会を開催 革命的共産主義者同盟政治局  9月初め、革命的共産主義者同盟は第35回全国…